안녕하세요~
전 기독교인이 아니였습니다.
잠시 하나님을 믿었을때도 있었지만 불교인이였었습니다.
왜냐하면 저희 엄마가 맹신적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고
그때문에 아버지와 많이 싸우고 많이 맞아 정신병원에 입원치료를 오랜동안 한 모습을 보고 자랐습니다.
저희 외할머니 종교도 불교였습니다.
물항아리를 올려두고 아침 일찍 일어나 약수터에서 떠 온 물을 올려두고 기도 하셨고 간혹 약수터나 산속에서 기도를 하셨더랬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 오신 우리 엄마의 종교는
처음엔 남녀호랑개교 였었고
그 다음엔 불교였었고
그 다음엔 대순진리교
이번엔 제가 변화되는 모습을 보시고는 하나님을 믿어야 할지...계속 본인의 종교를 믿어야 할지 고민중이십니다...
신이 저에게 주신 시련과 고통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얼마전까지 신당을 두번이나 차렸다가 없앴습니다.
많이 아파 가족이 힘들어 했던 시간들이 있었구요...
유년시절 부모님의 이혼과 경제적 어려움 또 진로의 고민을 할 때쯤엔 부모님의 부재가...
경제적 여건이 나쁘다는 이유로 뒤쳐지는 경험도 했었지만...
성인이 되어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하고 세 아이의 엄마로 살아오면서 부끄럽지 않게
나름 평범하게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할때쯤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는 것을 아픔으로 표현하고자 합니다.
알 수 없는 말들을 뱉어내고 들려오고 꿈으로 메세지를 보내오고 그걸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 저를 발견하게 되었지만
제가 저를 통제 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르며 제 자신을 제가 마구 때리기 시작했고 바닥에 머리를 박아가며 죽겠다고 하며...
혼자 길을 걷다 달리는 차에 뛰어 들겠다며 무작정 걷기도 했었습니다...
비 오는 날 갑자기 차를 세워달라고 하여 내리자마자 삼보일배를 해야 한다며 바닥에 이마를 대고 절을 하고...
집을 뛰쳐나가려 해 현관문을 밖에서 잠그고도 모자라 못도 박고 가족들이
저를 지키려 돌아가며 보초를 섰었습니다
아파트 현관앞에 엎드려 눈에 보이는 신에게 살려달라고 빌고 빌다 경찰차에 처음 타 보기도 했었더랬습니다...
기도를 하다보면 위인전에 나올만한분들이 제게 오셨다며 말씀을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제 입을 통해서 말이죠... 처음엔 제 생각도 아니고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무서워 많이 떨었더랬습니다.
캄캄한방에 혼자 기도 하다 그랬으니깐요...
무서워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자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최근에 하늘나라 가신 둘째아들 친구의 아버지라면서 본인도 살아있을때 당신들과 함께 했었던 사람이였다며
하날나라에 일찍 부름을 받고 먼저 왔을뿐이니 무서워 하지 마세요! 라는 말에
제가 알고 있었던 그 분은 하나님 말씀을 믿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실 줄 아는 좋은분이셨기에
마음이 놓였습니다. 그 말이 맞더라구요... 육신이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이였으니까요...
제게 오셨던분들이 여러 질문들을 하셨고 전 답을 하였습니다.
꼭! 면접을 보듯 말이죠...
어떤때는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었던적이 있었습니다.
누가 꼭! 묶어 둔 것 처럼 말이죠...
어떤때는 혼자 누워 있는데 여기 저기 누군가가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이 있었고
마비 증상도 있었습니다.
어떤때는 말을 하고 싶어도 생각과 마음만 있지 입을 떼지도 못할때도 있었습니다.
제 입을 물리적으로 열지 못하게 막은 것처럼 말이죠
하염없이 눈물 흘리고 소리내어 울기만 했을때도 있었습니다.
주체할 수 없이 말이죠...
간혹 제 눈에 믿기지 않는 여러 형상들이 보이기도 했었구요
거실에서 발끝만 보며 걷기를 밤새 하며 여러 말을 했었습니다.
멀쩡하게 있다가도 소리가 들리면 들리는데로 행동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었습니다.
손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메세지에 손에 하얀 장갑을 끼고 누군가가 떠 주는 밥을 먹고
어떨때는 밥을 먹으면 안 된다고 하여 한달간 물만 먹고 굶고 씻지도 않았던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사용한 것이 돌아 다니면 안 된다는 메세지에 까만 비닐을 항상 옆에 끼고 다녔던적도 있었구요...
저로 인해 세상이 변한다는 말에 무서워 정말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구나...
내가 죽어야 하는 상황이구나...라는 생각에
자살을 여러번 시도하여 병원에 다녀오기도 ...몇일간 잠들다 깨어나기도...온 몸에 멍이 들도록 스스로 청소도구를 이용하여 닿을 수 있는 곳은 마구
때려 성한 곳이 없게 하고 발바닥은 손에 잡힌 볼펜으로 마구 찍어대
구멍이 숭숭나게도 하였습니다...
커터칼로 팔목을 여러번 긋기도 했지만 신의 뜻인지는 몰라도 생체기만 났지 큰 일은 일어나지 않았더랬습니다...
신당의 붙박이 장에 스카프를 메달아 목을 메어보기도 했었구요... 몸에 힘을 빼면 알 수 없는 움직임이 저를 살려냈구요...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였으니깐요...
제 몸에 귀신이 깃들었다는 생각에 나름 쫓아 보려 한 행동들이였습니다.
백화점 화장품 매니져로 25년간 잘 살아왔던 엄마가 갑자기 무당을 한다 하고 이상행동을 자꾸 보이니 아이들이 상처받을 걱정이 되어 따로 신당을 얻었습니다...
일부러 신엄마와 가깝고 집과는 좀 거리가 있는 곳으로 말이죠...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그랬었지만 결론적으론 상처를 주고 말았습니다...
신이 계신다면
왜???
엄마를 이렇게 만들었냐며...
제발 엄마가 정신을 못 차려 그러는거라며... 정신 좀 차리라구요...
잘 울지 않고 헤맑게 웃어주던 아이들의 얼굴에 눈물이 마르지 않는 것을 보며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제발~~~제발~~~바르게 살 수 있도록 해달라구요...
이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부처님이든 하나님이든 어떤신이든 기도를 들어주시라구요...
아파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겁니다...
제가 통제 할 수 있는 상황이 안 되었거든요... 신병을 앓았던분들은 알 수 있었을까요???
신어머님께 제게 일어난 일을 말씀드려도 그럴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셔서 전...
그분께 걱정을 안겨드리는 것만 같아 죄송하다는 말만 연신했었더랬습니다...
제가 여려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걱정하게 하여 진심 죄송했었거든요... 제 의지가 아닌데... 어쩔 수 없었는데도 말이죠...
제가 가족 옆에서 힘든 모습을 보여주느니 병원에 입원하는게 맞는 거 같아 제가 엄마에게 말해 입원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을때도 입으로는 여러말들을 뱉어내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 생각으로는 정신병원에 계신분들이 오히려 안쓰러웠었습니다...
왜???
무슨 이유로???
혹시 나와 같은 이유인가???
그러면서도 나는 다른 병을 앓고 있는건데...
신병!!!
현대의학으로는 증명 할 수 없는 신병 !!! 을 말이죠... 저 나름 난 다른 병을 앓고 있다며 ㅎㅎㅎ 그랬더랬습니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저도 병원에 계신분들과 다를바 없었습니다... 제 의지로 이겨 낼 수 없었거든요...
그분들이 그랬듯이 말이죠...
아프고 싶어 아픈사람이 없듯이...
흔히 말하는 팔자가...
운명이...
말이죠...
저를 살려 보겠다고 밤새 울며 기도하신 울엄마...길을 걷다가도 울으시고... 저 대신 세 아이의 밥을 챙겨주시면서도 울으셨다고 합니다...
병원에 있는 제 얼굴이 떠 올라 손녀 손자들을 뒤로 하고 저만 데리고 아무도 없는 곳에 데려가 살까? 라는 생각도 하셨다구요...
나쁜 생각도 하셨었구여...
여동생은 자신이 신내림을 받아야 하는데 제가 받아 잘 못 된 것만 같다며
신내림을 받아 명산을 돌아 다니며 울고 불고 기도를 했었구요...
남동생은 제가 헛소리를 하는 것 같다며 누나가 모시는 신을 자신이 모시면 누나가 괜찮은거냐며 자기에게 모두 오라고 소리를 질렀더랬습니다...
본인도 아이 둘의 아빠였는데 말이죠...
아픈 시간에도 아이들한테만은
제가 자랐을때처럼 힘들게 살게 하고 싶지 않아 많이 노력하며 살아왔었기에
저만 이세상에 없으면 ...가슴 아픈 일이 더는 없을테니까...
예전의 나의 모습만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어려번 나쁜 시도를 했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모두 보여주게 되었지만요...
아이들을 키워 오며 오버랩 되듯 저의 어린 시절을 떠 올려보았을 때 참 부끄럽고 힘든적이 많았었습니다.
힘든 순간을 벗어나고자...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치열하게 앞만 보고 살아가다 보니
뒤 돌아 볼 여유가 없었는데...
그동안 잊고 살았던...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속에
그때는 잘 몰랐었던...
지나고 보니 참 부끄러웠던 순간들...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많이 싸우셨습니다.
싸우기 보단 엄마가 아빠에게 많이 맞으셨습니다. 그 당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엄마는 억울함에 울부짖으셨고 아빠는 더 소리치며 심하게 때려 결국엔 ...정신병원에서 입원치료를 오랜시간 했었던 적도있었습니다.
이혼과 결합을 여러번 하신 이유에는 저희 삼남매가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어린 제가 보기에도 함께 하시다가는 엄마가 죽을 것 만 같아 빨리 나가시라고 할 정도였으니깐요...
엄마가 계시지 않는 동안엔 여럿 새엄마들이 오셨다 가셨었구요...
두 분이 함께 하실 때
저희 엄마가 노점상을 하셨었는데
삼남매중 저와 남동생 둘은 리어카 매대밑의 좁은 공간에 태우고 막내 여동생은 등에 업은채로 12km 이상 끌고 시장에 나가 악세사리와 카세트테이프를 파는 장사를 하셨었습니다.
엄마가 장사하시는 동안 저희 삼남매는 리어카 매대 아래가 집이였고 놀이터 였었습니다.
철이 없는 아이들이였다보니
좁은 매대 아래는
숨박꼭질도(매번 들키지만 재미있는곳)
소꿉놀이 하기에도
뜨거운 태양을 피해 낮잠을 잘 수도 있어 좋았고
엄마랑 함께 있는 순간이 너무 좋아 노점에서 먹고 자고 놀고 하는 일상이 좋기만 하였었습니다.
엄만 낮엔 장사 하며 저희들을 돌보시고 집으로 돌아오면
아빠와 싸우시다 맞으시기를 반복하면서도 저희들을 지켜내고자
힘든 일상을 기도의 힘으로 이겨내셨었습니다.
어린 제가 잠결에 간절하게 기도하시던 엄마의 모습을 자주 보았었거든요
그렇게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가게와 집 그리고 승용차가 흔치 않았던 때 승용차도 마련 하게 되었고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을 차려
저희가 살던 곳에서는 그 나마 남부럽지 않게 살았던 때가 있었는데
그것도 잠깐...
아버지가 아는 지인과 동업을 하신다며 보증을 잘 못 서는 바람에 모든 걸 잃게 되어 가족 모두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엄만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어 저희들을 데리로 오겠다며 나가셨고 아버진 새엄마와 동생 둘을 데리고 지방으로 이사 가셨습니다.
그 당시 전 초등학교 5학년 탁구선수 생활을 해왔었던때라 혼자 살던 곳에 남을 수 밖에 없어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잠깐 머물렀었는데
아침운동 후 수업을 해야했기에 새벽같이 나오다보니 아침밥 굶기 일수였고 도시락을 싸서 갈 수 없는 상황이여서 친구 도시락을 나누어 먹거나(눈치 보면서) 굶거나... 주머니 사정이 괜찮을 땐 사발면을 사 먹으며 운동을 하다...
나무토막 넘어가듯 기절해 쓰러져 버렸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코치선생님께서 전.후 사정을 들으시고는 그 당시 선생님의 월급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38년전 월 30,000상당의 기숙사비용을 대신 내주셔서 전 중고등학교 선배들과 함께 기숙사 생활을 하며 운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밥을 굶지 않고 따뜻한 방에서 자고 씻으며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말이죠
또 하루는 지방으로 시합을 나갔을 때의 일입니다.
탁구라는 운동의 특성상 스매싱을 할 때 발을 앞으로 구르며 쳐야 하는데...
그 순간 낡은 운동화 앞쪽으로 발가락 다섯개가 나와버렸습니다...
시합은 뛰어야 하고 한 쪽 신발만 신고 뛸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급하게 신발가게를 찾아 가 신발도 사 주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월급 타신 날에는 절 몸 보신 시켜주신다며 고기집에 데려가 주시기도 하셨었구요...
부모님도 아닌분이 저를 위해 그 큰 금액을 내 주신다는게
그 당시 얼마나 큰 도움인지 몰랐었습니다.
선생님이라서 제자를 챙기기 위해 해 주신 선심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도 초등학교 선생님의 도움으로 서울에 있는 명문중.고등학교를 갈 수 있었고 거기에서는 숙소생활을 하며 운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 코치선생님께도 많은 도움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당시 학교에서 지급된 유니폼이 유일한 제 옷이였습니다...
다른 친구들과 선배들은 합숙기간이 아닐땐 통학을 했었고
전 몇몇 친구들과 숙소생활을 해 왔던터라
개인 물품은 개인이 구입해 써야 했기에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샴푸도 빨래비누도 속옷도(생리대도) 없어 잘 씻지도 못한데다 갈아입지도 못했으니 불쾌한 냄새가 많이 났었을겁니다.
혼자 할 수 없는 운동이다보니 저랑 파트너가 되는 선배나 친구들이 싫어하는 모습을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었고 전 위축되어 훈련을 하는데 집중하기 보다는 어린 나이다 보니 제가 더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하기 싫은 운동을 억지로 하는 것 처럼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저를 불러 왜 그런지 힘든부분을 말 하라고 하면 전 부모님의 이혼으로 정신적으로 힘든부분만 말했던 것 같습니다...
동생들 걱정등을 말이죠...그냥 지나칠만도 하실텐데 같이 고민해 주시고 어려울수록 잘 이겨내야 한다고 말씀해 주시며
개인적인 시간을 내어 주셔서
저를 많이 가르쳐 주셨었습니다.
그 당시 기억으론 동료들이 많이 시셈 했었던 것 같습니다.
저를 많이 챙겨 주신것에 대해서 말이죠...
주전에 들기 위해 선의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다 보니
지금 시점에 선생님께서 저에게 해 주신 부분은 아마도 다른 학부모의 항의를 많이 받을만한 일이였을겁니다.
훈련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가까운 곳에서 코칭을 해 주셔야 하는부분이 있었는데 제 기억으로는 한번도 불편해 하셨던적이 없으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상처 받을까싶어 그런 것 같습니다...
불쾌한 냄새로 많이 불편하셨을텐데도 말이죠...
선생님께서 체육선생님으로 발령 받아 고향으로 내려가실때 쓴 일기장엔 말로 표현하지 못한
감사함, 서운함, 헤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선생님의 앞날 잘 되시기를... 다시 만나기를 ...
하나님께 기도하며 써 내려간 일기장을 우현히 찾고
정말 힘들었을때 선생님의 권유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해 하나님 말씀을 듣기 시작하며
명언들을 찾아 읽고 마음에 세기며 힘든 걸 이겨내려 했었던게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어려웠던 순간순간 도움을 주신분들이 많았습니다.
제 동생들에 비하면 미안할만큼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길을 열어주시고 알려주셔서 나쁜길로 빠지지 않고 바로 살 수 있었는데...
막내여동생은 초등학교 5학년때 친구,선배들과 어울리다 집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현실을 보고싶지 않아 친구들과 노는게 마냥 좋아 바깥으로 나돌아 다니길래 가끔 제가 집에 가면 잔소리를 많이 했었더랬습니다.
"엄마 아빠 이혼한 가정에서 큰 막되먹은 아이들이라는 나쁜평판을 듣지 않게 행동 잘 하고 다니라고 말이죠..."
전 그래도 끼니걱정은 안 하고 살고 있었지만 동생들은 끼니걱정을 하고 살고 있었거든요...
엄마가 식당에서 먹고 자고 벌어 저에게 돈을 주시면 전 그 돈으로 동생들에게 들키지 않게 먹거리를 사 가곤 했습니다.
아마도 눈치는 챘을겁니다. 서운하기도 했었을거구요. 언니에게 누나에게만 엄마가 찾아 간다고 말이죠
엄마가 없을 때 언니가 나한텐 엄마였어! 라고 말을 해주는 여동생입니다.
제가 말할 수 없는 아픔이 제 여동생에게도 많이 있었습니다.
바로 밑의 남동생에게도 말이죠...
살아오는동안 저 보다도 더 큰 시련과 고통이 있었는데도
잠시 아팠던 저를 바로 살리고자 기도하며 울부짖었던 동생들입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였지만 많이 미안하고 고마운 동생들입니다.
제가 많이 아프기전엔 나름 울타리였었을텐데요
우리엄마에게
동생들에게
우리 세아이들에게 말이죠...
지금은 예전의 제가 아니라 말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잔소리로 들릴테니깐요...
그래서 제가 찾은 일기장에
16살때의 엄마가 불우한 가정과 진로의 고민으로 힘들어 할 때 써 내려간
일기 내용을 읽어주며 하나님의 말씀과 명언들을 일기장에 쓰고 마음에 세기며
한동안 힘들었던 것을 이기게 해 준 힘인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너희들이 기회가 된다면 교회든 성당이든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깨우쳤으면 좋겟다고 말이죠...
그 말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는지 몇일전 16세 막내아들이 "엄마! 나 친구랑 교회 가도 돼?" 라고 말을 하더라구요...
그래서 좋은 생각인거 같다고 엄마는 하나님의 말씀이 힘이 될거라 믿어 라고 말이죠
16세 사춘기 막내아들!
한참 외모에 관심이 많을 나이가 맞죠!
쌍커플 없는 눈이 불만인지 거울 보고
눈을 올렸떴다 내려떴다를 반복하고 있길래
아들! 요즘 뜨는 연예인들은 다 무쌍이더라~~
더 매력 있고 기억에 남지 않니?
외국에선 쌍수 없애는 수술도 한다던데??
막내 아들 왈!
다들 쌍수 하시고 왜 나한테만 무쌍을 강요해요?
차라리 저를 엄마 쌍커플 수술 후에 낳아 주셨더라면
저도 쌍커플을 갖고 태어났을 거 아니예욧!!
그러는게 아니겠어요...ㅎㅎㅎ
(참고로 외할머니, 저, 큰딸 3대가 쌍수를 했습니다^^::)
공부에 관심이 없는 녀석인 줄은 알았지만...
요즘 애들은 여러모르 많이 빠르다던데...
울막내아들은 많이 더딘거 같죠?^^:
어찌보면 순수한 것 같기도 하고...
다르게 보면 너무 몰라 왕따(무시)를 당하는게 아닌가?라는 걱정도 되지만
그래도 밝고 건강하게 자라주고 있는 것 같아 감사할따름입니다.
태어나자마자
누나 형에 비해 몸이 많이 약해 병원을 자주 드나들어
막내를 임신하고 기쁘기보단 걱정과 고민을 오래 하며 안 좋은
결정을 하려 했었던 벌로 많이 아픈건가?? 라며 걱정으로
키웠었습니다.
말이 트이면서
새벽에 자다 갑자기 일어나 울고 불고 소리 지르고 무섭다고
자꾸 누군가가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고 안아달라고 했더랬습니다.
안고 토닥토닥 하며 무서운 꿈을 꾼 것 같다며
엄마 아빠가 옆에 있으니 안심하라고 하여도
밤새 자지도 않고 제가 깜박 잠들라치면 깨워 무섭다고 매달렸었습니다.
TV와 불을 다 켜두고 자도 마찮가지였습니다.
붙박이장 안에 또는 8층 아파트 베란다 창문밖에서 자기를 쳐다보고 있다고 말이죠...
가지고 놀던 장난감 인형이 눈을 깜박거렸다고 하기도 하구요...
아이가 체력이 저하되어 기가 약해 그럴 수 있다 하여
한약에 영양제도 먹이고 낮잠을 재우지 않고 밤에 푹 재우면
나아질까싶어 그렇게도 해 보고
병원을 다니며 심리치료를 해봐도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나중엔
주위의 권유로 점집을 찾아가 아이상태를 말했더니
잘 모르는 용어로 많이 안 좋다구요...치성을 드려야 한다구요...
아이가 좋아질수만 있다면 한번 믿어보자라는 마음으로 했습니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또 그랬습니다.
그래서 다른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 가 굿을 하라고 하여 굿도 해보고 부적도 써서 집안 곳곳에 붙쳐보기도 했습니다...
결과는 마찬가지...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그때 당시 친정엄마외에는 어디에다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이상하게 볼까봐서요...
병이라고 할 수도 없고...다른 이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게 보인다고 하니까 말이죠...
하루는 큰 아들이 초등학교 2학년, 막내는 4살 때
근무하고 있는 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 언제 와?
왜? 아직 끝나려면 멀었는데 왜 그래?
엄마 무서워~~(익명)이가 자꾸 뭐가 보인다고 그래요
지금 오면 안 돼요?
순간 철렁 했습니다...밤에 잘 때만 그랬었는데...낮에도 그러다니...
그당시 전 직장생활을 인천에서 서울로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저녁 10시
큰아들이 학원 다녀 온 후
유치원에서 동생을 데리고 와 간식 먹이고 놀아주고 있을 때 일어난 일이였습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여기저기 전화하다 제일 빨리 도착할 수 있는 사람은
친정엄마밖에 없었습니다.
퇴근시간이 넘 멀게 느껴졌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도 그날따라 더디가는 것만 같았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는 친정엄마가 오셔서 아이들을 케어 해주시면서부터 점차점차 좋아지기 시작했는데
신기하게도 친정엄마가 안고 잠이 들때까지 기도를 해주시고나서부터는 말이죠...
막내아들도 할머니가 외우는 기도문을 같이 하다 보면 안 보였다고 합니다.
믿는 신은 달랐지만 기도의 힘은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야식과 함께 술 한잔을 하며 웃고 떠들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그 날의 이야기가 우연치 않게 나왔는데
큰아들 정말 무서웠다고 해요
막내아들은 그 때 일을 어렴풋이 기억하는지 진짜 보였었다구요.
지나고 보니
갓난아이때 눈물 흘리며 울고 있는 아이 눈망울을 보며
눈으로 무언가를 말하며 서럽게 울고 있는 거 같다며 말했더랬습니다.
그냥 눈망울이 슬퍼보이는 아이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의사표현이 안 될때는 울음으로 표현을했었던 것을 저희는 몰랐던 것이 아닌가 싶어 마음이 많이 아팠었습니다.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듯이 여느 사춘기 아이들과 똑같이 잘 자라고 있습니다.
건강염려증? ㅋ 이건 좀 심하지만 아주~~~건강하고
자기관리를 철저히 잘 하는 아이로 절제력은 우리집 식구들 중에
최고입니다^^
유튜브로 페이스북으로 책으로 명언들을 찾아 보다 세기고 싶은 글이 있음 저에게 말해줍니다.
엄마 어때? 정말 좋은 말이죠? 라며 말이죠^^
할머니 껌딱지가 되어 크다보니
말투(사용하는 단어)가 좀 나이들어 보인다고 친구들이 말한다고 합니다.
나름 친구들이 자기를 재미있어 하고 나쁘게 보지 않는 것 같다며
나름 허세를 부리듯 이야기 합니다^^
학업성적은 뛰어나진 않지만 이번에 부회장이 되었다고 하더라구요~ㅎㅎㅎ
웃을 때 매력이 넘치는 울막내아들은
저희집의 바카스! 같은 존재입니다~
집에서만이 아닌 밖에서도 그런 존재가 되었으면하는 바램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바램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아 감사할따름입니다.
얼마전엔...
이쁘진 않았지만 화장품 매니져로 유니폼을 입고 일 하던 엄마가
지금은 인테리어일로 외부에서 일을 하다보니 얼굴은 검어지고 기미는 세트로 따라왔고
청바지에 청자켓 작업화에 모자를 썼으니 좀 거칠어 보이고 남자 같이 보이는 저에게
막내아들이 부탁을 하지말입니다.
엄마 학교 올 때는 그렇게 입고 오지 말라며
누가 보면 자기는 아빠가 둘인 줄 알거라며 말이죠 ㅎㅎㅎ
최근엔 여러번 고속도로휴계소 여자화장실 이용할 때 여러차례
"아저씨! 여기는 여자 화장실이거든요???" 라며 소리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어렸을 때 운동하던 시절 들어보고 최근에 다시 들어 봅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의 이혼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힘들었었을 때는 동생들과 함께 이겨낼 수 있었던 아픔이였고
제가 갑자기 아팠을때는 가족이 저를 지키려 기도하고 붙들어 주어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가족이 함께라는 말이 추상적이게 형식적이게 멀게 느껴지던때가 있었더랬습니다.
TV & 라디오에서 가족이 힘이 되었다는 사연들을 듣고 보며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겪으며
가족이 없었다면...
가족의 기도가 없었다면...
가족의 눈물을 보지 않았다면...
이겨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신께서는 저에게 이 깨달음을 주시고자 그런 아픔을 주신 것 같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일은 여자들이 하기엔 다소 힘든부분이 있습니다.
기반 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현장이다보니 화장실도 식사도 잠자리도 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감사할따름입니다.
일 할 수 있음에
가족과 함께 할 수 있음에
변화된 삶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가끔 힘든 순간이 오면
다른 어떤 이는 능히 이겨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 또한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면 된다라며 이겨내고 있는 요즘입니다.
지나간 시간들을 돌이켜 보았을 때
힘든 순간! 순간! 절망적일 때도 있었고
헤쳐나갈 수 없을 것만 같아 막막했던 순간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니" 라는 말처럼 지나가더라구요^
지금은 정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아프기전에 하던 일과는 360도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의 일터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이동식주택이 자리잡고 나면 연동부분을 마감하는 인테리어 일을 신랑과 아들 그리고 가끔
남동생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전국일주를 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이 일을 하게 된 계기가 아프고 난 뒤 집에서 살림을 하게 되었고
가전제품 교체로 인해 세탁실을 마련하게 되어 한 곳을 손보니 다른 곳도 손을 보게 되면서 인테리어의 매력을 느껴
자청하여 도와주다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전국을 상대로 일을 하다보니 새벽 2시 또는 3시에 하루를 시작하고
잠자리는 모텔에서 또는 늦은 시간(밤12시 또는 새벽 2시)까지 마감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길게는 24시간을 쉬지 않고 일 하는 경우가 있는데
회사에서 강요한게 아니라 자청해 모텔에서의 잠자리가 편치 않아
간혹 하루만에 끝낼 수 있을 땐 이런 결정을 할 때도 있습니다.
기본 차로 이동하는 시간은 왕복 6시간~8시간 걸리는 경우가 많아
3개월간 차로 이동한 거리가 10,000km 가 넘었습니다.
기반시설이 다 마련되지 않은 현장이다 보니
화장실 , 먹거리, 잠자리가 편치 않고 근무 여건이 남달라 함께 할 파트너를 구하기 쉽지 않아
덕분에 가족이 동료가 되었습니다.
가족과 함께여서 편하기도 하지만 자주 투탁거리고 부딛치기도 합니다.
일터에서 큰 볼일(화장실)을 볼라치면 합심하여 차를 타고 화장실 찾아 헤메고 다니는 진풍경을 펼쳐도 부끄럽지 않고 편해 좋습니다^^
코로나 여파인지 아니면 지역 특성상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저녁 7시 이후 영업하는 식당을 찾기 어려워 간혹 저녁을 소홀하게 먹는 경우가 잦아 최근엔 세컨하우스에서 홈캠핑처럼 사용하던 집기들을 챙겨 가지고 다니며 끼니 해결을 하고 있습니다.
가족이 함께 하기때문에 가능한 일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집 한채를 지을 수 있는 공구들을 실고 다녀야 하기때문에 차량 유지비 또한 많이 듭니다.
1톤 탑차에 이 많은 공구들이 다 들어가냐며 신기하게 보시는분들이 많습니다.
저희 신랑은 인테리어 경력이 30년으로 어지간한 건 다 할 줄 알기에
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가족이 전국일주를 하며 일도 배우고 인생도 배우고 많은 분들을 만나고 있는 요즘입니다.
손재주가 많으면 고달프다는 말이 있지요^^::
이동식주택이 만들어져 트레일러에 실고 현장에 도착하기전에 기초 공사(공구리)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간혹 이 공사도 저희가 맡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동식주택이 이동한 후에 자리 잡고 나면 저희가 연동하고 마무리를 하고 있는 일입니다.
많은 공구와 자재 그리고 기계가 필요하기때문에 차 안이 가득가득!
승합차 안은 캠핑용품과 식료품 물등으로 가득하구요
현장에서 다른현장으로 넘어 갈 수도 있어 갈아입을 옷은 여벌로 3일치를 챙겨 다니기때문에 운전석 뒤에도 가득하구요
뭐가 이렇게 많냐고 물으시는분들이 계신데요...
한번은 간단한 간식과 물을 사기 위해 한시간을 돌아다닌 적이 있는데요..
세컨하우스 또는 전원주택으로 이동식주택을 선택하시는 경우가 많다보니 한적하고 경치좋은 곳이 대체로 편의시설이 멀리 있는 게 대부분이라 시간을 아끼기 위해 미리미리 좀 많이 챙겨 다니는 편입니다^^:
일을 마친 후 집에서도 저의 일은 끝나지 않습니다.
오자마자 현장에서 가져 온 쓰레기 분리수거로 버리고
작업화 털어 닦아 논 뒤
입었던 작업복들을 세탁기에 넣고
그릇들과 집기들 닦아두고
자재 재고파악 해야 끝이 납니다.
이 일을 시작하며 제가 조금 더 씩씩해 보이는 것 같긴하지만
그래도 난 여자인데...50이 다 되어가는 나이로 사춘기보다도 무섭다는 갱년기를 보내고 있는 여자인데
무거운 것도 척척 잘 나르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저녁엔 관절이 아파오고 붓고 힘들어
술기운으로 잠들기도...
약을 먹고 잠들기도 하지만
표현하진 않았습니다.
모두 다 힘틀테니깐요...
신랑과 아들은 이불속에서 쉴 때
전 빨래와 청소 정리 다음 날 필요한 공구 준비등을 하며 서운한 마음에 속으로 욕을 하기도...푸념을 히기도...
마음 돌려 감사의 기도를 하기도...미워했던 마음에 대한 참회의 기도를 하며 힘든 것을 이겨내다
너무 화가 나 하루는 속의 말을 다 뱉어버렸습니다.
아들이 엄마가 좀 더 해주었으면 일이 더 수월했을텐데...라며 이야기를 꺼낸 것이 시작이 되어
전 아들아 엄만 여자이다보니 이 일을 하는데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어
손아귀힘이 없어 기계를 키고 끄는 것도 힘들어 하지만 도움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어 라고 말을 하다...
저도 모르게 제일 만만한 신랑한테 화살이 돌아가 막 퍼부었습니다.
나도 여자라고...나도 힘들다고...도와주면 안 되냐고...낮에 같이 일 했으면 나도 쉬어야 한다구
당신이 나를 챙겨주지 않으니...아들이 저런말을 하는게 아니냐며
너무 화가 나 막 퍼부었습니다.
듣고 있는 큰아들이
엄마! 여자가 특권이야?
뒷통수 얻어 맞은 기분으로 어이없어 했더랬습니다.
정말 어이가 없어
아들아...그만하자...
너 장가 가서 너 부인한테도 엄마한테 한 것처럼 하면 절대 안된다...
라고 말을 하면서도...자기 부인한테는 잘 하겠지? 라며 두가지의 마음이 공존하더라구요...ㅎㅎㅎ
너무 화가 나면 아무 말이나 해 버리게 되어 끝낸 상황이였지만
엄마! 여자가 특권이야? 라고 말을 하게 가르친 우리 부부의 잘 못이 큰 것 같습니다.
더 나아가 저의 잘못이 더 큰 것 같습니다.
힘들어도 잘 이겨내는 척 !
큰 소리내고 싸우느니 내가 하고 말지...라며 살아왔던 것이
전 그런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제가 좀 더 슬기롭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면
아들이 그런 말을 안 했을텐데...
좀 더 치열하게 싸워 아빠를 변화시키려 했었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을텐데...
친정엄마가 그렇게 살아오신 걸 보고 자라왔고
또 그렇게 가르쳐 주셨고
참고 살아가는게 맞다고 생각했었구요
요렇게 얄밉게 이야기 한 둘째 아들놈 초등학교때 야구하고 싶다고
몇달을 졸라대길래
엄마가 운동을 해 봐 안다
많이 힘든 길이니 시작을 안하는게 맞고 정말 하고 싶으면 취미로만 하는게 나을거라구요...
나중엔 자기가 하고싶어하는거 안 해주었다고 원망 듣지 않고 싶어...
하다 힘들면 말겠지라며...가볍게 클럽야구를 시작하여 선수생활을 고2까지 하다 그만두었는데
하는 동안도 제가 부모 부재인상태로 운동을 해 봤던터라
직장생활을 하면서 쉬는 날 오롯이 큰아들
학교로 시합장으로 전지훈련장으로 개인래슨장으로 병원으로 강행군 하며 살았더랬습니다.
고3딸보다 큰아들을 더 챙겼으니깐요...
큰딸은 스스로 알아서 잘 한다고 믿었던 것도 있었는데...나중엔 많이 서운했었다고 하더라구요...
제가 시집 온 시댁도 불교집안이였었고 시작은어머님은 조계종을 다니며 새벽기도와 100일 1000일 원을 세워 기도를 하셨던 분이 계셨습니다.
둘째 아들을 낳고 육아휴직으로 잠시 쉴 때 시작은어머님이 연락이 와 절에 가 보지 않겠냐며 물으시길래 그게 시작이 되어
아이들이 아프지 않고 제가 자랄때처럼 어렵게 살지 않게 하고 싶은 욕심에 절에 가 보시도 하고 기도도 하고 명산(봉정암)에 7시간 걸어 올라가
새벽까지 108배를 반복하고 다음날 절뚝거리며 6시간을 내려오는 기도를 여러번 했었습니다.
3000배를 목표로 하고 5번을 올라 기도를 했습니다. 나름 간절히 말이죠...
집에서 108배 원을 세워 하기도 하였었습니다.
산에 갈 땐 친정엄마에게 여동생에게 아이들을 부탁하고 말이죠^^::
어느 부모가 자식이 잘 못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제 마음속엔 이렇게 헌신적으로 너희들을 위해 빌고 있단다라고 보여주고 싶은것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린날에 제가 받아보지 못했던 걸 보상받는 것 처럼
이렇게 하면 마음이 좀 든든해졌습니다.
제가 부모로서 최선을 다 하고 있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둘째 동생만 챙긴다는 큰딸의 볼멘소리에
엄마가 운동을 해 봐서 안다 부모가 뒷바라지 안하면 안 된다...
엄마가 몸이 두개가 아니니 좀 이해해 주면 안 되겠니? 달랬다가
어느날은 큰 소리로 언성을 높이며 싸우다
손지검을 하게 되었고 큰 딸은 전 뭐냐구요? 라는 말에
도대체 부족한게 뭐냐고 하며 소리 질렀더랬습니다.
그 이후론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어버렸지만
제가 아플때 가장 이성적으로 이야기를 하며 저를 바로 잡아보겠다며 설득아닌 설득을 하였었고
저때문에 힘들어 했었던 외할머니를 도와 동생들을 돌보기도 외할머니 혼자 울고계실까봐
자주 할머니에게 전화도 하고 같이 외출도 하고 같이 울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돌이켜 보면 친정엄마는 살기 위해 저희들을 두고 나가셔서 갖은 고생을 하고 살아오시느라
저희 삼남매에게 주지 못했던 사랑과 관심을 손주들에게 다 주고 계신것 같습니다.
제가 너무 아팠을 때 제 입으로 저희 조상님이라고 하시며
저를 죽이겠노라며 데려가겠노라며 엄마앞에서 큰소리 쳤었습니다.
엄만 안된다며 저의 전부라며 제가 없으면 엄마 본인은 죽는다며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었습니다.
정신 없는 와중에도 엄마의 그 말에 가슴으로 울었습니다.
제 입으로 다른분의 말씀이 있을 땐 제 감정과 마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었으니깐요...
그 때 말씀을 주셨습니다.
지금까지의 고난과 시련을 준 이유는 있으니 앞으로 살아가며 답을 찾으면 된다구요...
우리는 조상의 이름으로 찾아왔지만 하나님의 심부름을 하는 분이라며 앞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며 답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저희 엄마에게도 기도의 힘으로 이번의 고난도 잘 이겨냈으니 앞으로 하나님앞에서 기도를 하며 답을 찾으며 살라구요
그 이후부터 점차 점차 제 삶이 바뀌기 시작하며 지금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감사할따름입니다.
아직까진 교회를 나가진 않고 있습니다.
성당이든 교회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울 수 있는 곳은 세상 어디에든 있다는 생각에 매일 배우며 살고 있습니다..
저를 알고 있는분들은 아마도 제 이야기를 다 알지 못할 겁니다.
일부분 또는 정말??? 그런 일을??? 할 겁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잘 하고 다니지 않고 남의 입에 제 이야기가 오르고 내리는 것을 너무 싫어했던 제가 이렇게 글을 남기는 이유는
저와 같이 분명히 말하지 못하는 아픔이 있는 분들이 많이 계실거라 생각하고 만약 계시다면 기도의 힘으로 이겨내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남겨봅니다.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라는 말을 콧웃음으로 넘겼던 저 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겪은 일들을 돌이켜 보았을때 제가 힘들때 일으켜 세워 주셨고 또 부모님으로 선생님으로 친구로 가족으로 지인으로 스쳐가는 인연으로
그 분들을 통해 저에게 메세지를 주셨고 가르침을 주셨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 순간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제가 걸어가는 길이 험난할지라도 하나님과 함께 하기에
능히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제 이야기의 일부만 남겼습니다. 두서없이 써 내려간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금 발걸음 막 뗀 아이처럼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하소서~~ 말처럼 말이죠^^
이제서야 기도의 힘을 알게 되었습니다. 날마다 새롭게 하소서
박소정
2023.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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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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